일요일 오후 가까운 공주 공산성에 다녀왔다.
조그마한 산성 같아 보여서 나른한 오후에 산책 삼아 갔었는데 산책보다 살짝 등산에 가까운 여정이었다.
공산성주차장에 주차하고 공산성 입구까지 300미터 정도 걸어서 이동한다. 주차요금은 무료다.
걸어가는 인도 옆에 백제역사유적지구 안내판이 보인다.
도로 가운데로 무령대왕의 동상이 서있고 주변으로 커피숍, 카페 등이 많이 있다.
공산성 입구에서 입장권을 구매했다. 성인은 1인당 3천원이다.
공산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백제역사 유적지구'에 포함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니 위쪽으로 금서루가 보인다.
금서루로 오르는 길에 비석군이 있다.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들이다.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송덕비와 계민천교영세비 등 47기가 있다.
대다수는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새긴 공덕비인데, 여기에는 "영세불망비, 청간성정비, 거사비, 만세불망비, 유애불망비, 청덕선정비" 등의 글이 새겨져 있다.
우의정, 도순찰사, 관찰사, 암행어사, 목사, 판관, 군수, 우영장, 중군 등 주로 충청감영과 공주목 관아에 배치되었던 관리의 송덕비가 많다.
공주 공산성 안내판이다. 올 때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더 큰 것 같다.
금서루로 올라간다.
공산성 금서루는 공산성 4개 성문 가운데 서쪽 문루(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이다.
성 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의 문헌 기록과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의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자리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은 것이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서루를 지나 왼쪽 공산정으로올라간다.
공산정은 공산성 서북쪽 정상에 있는 정자이다. 공산성 안에 있는 백제 왕궁 관련 유적을 비롯하여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금강철교(국가등록문화재 제232호) 등 공주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금강의 낙조와 야경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공산정에 관한 기록은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으나 18세기 후반의 충청도읍지 공주목 지도를 보면 '후락정'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공산정은 1970년대에 새롭게 만든 것으로 이전에는 유신각 또는 전망대 등으로 불렸다. '공산정'이란 이름은 2009년 시민 공모를 거쳐 지은 것이다.
공산성 왕국유적지 안쪽에서 올려다본 공산정의 모습이다.
유적지 내부에는 공산성 역사체험장도 마련되어 있었으나 그다지 체험할 건 없었다.
공산성 왕궁유적지는 터만 남아있고 건축물은 하나도 남아있거나 복원된 것이 없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인 공북루다.
공북루는 공산성의 북쪽 문루(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로 금강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남북 통로의 주 출입문이다. 본래 공북루 자리에는 망북루가 있었는데 허물어져 터만 남아 있었다.
충청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하면서 1603년(선조 36년)에 공산성을 크게 고쳐 쌓고, 이때 공북루와 그 옆에 월파당을 함께 지었다. 여러 차례 고쳐 지었으며, 월파당은 1954년에 철거되었다.
공북루의 아래쪽은 성으로 통하는 통로로, 위쪽은 마루를 만들어 금강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공산정에서 내려다본 공북루의 모습이다.
문루 안에는 여러 편의 글과 시를 걸어 두었다.
공산성 공주 잠종냉장고이다.
공주 잠종냉장고는 충청남도에 있는 잠업 농가에 누에 씨를 보급하기 위해 만든 지하 저장시설이다.
1914년 충남잠업강습소가 공주에 생기면서 누에를 치는 보관소와 뽕밭이 새로 조성되었다. 누에의 먹이인 뽕잎이 나는 5월까지 누에의 부화를 늦추기 위해 잠종냉장고가 공산성에 만들어졌다.
겨울철 금강의 얼음을 왕겨에 싸서 장종냉장고에 넣어 두면 여름 내내 녹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를 이용하여 누에의 부화 시기를 늦추었다.
공산성 내의 잠종냉장고가 있는 지역을 '빙고재'라고 하는데, [공상지]에는 공산성 안에 빙고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조선시대 빙고 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잠종냉장고가 있는 능선을 넘어가면 은영사라는 사찰이 내려다 보인다.
영은사 앞쪽 금강변으로 공산성 연지가 내려다 보인다. 연못터에 단을 둔 석축이 수직에 가깝게 쌓여있다
영은사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관일루가 방문객을 맞아준다.
영은사는 조선 세조4년(1458)에 세워진 사찰이다. 묘은사로 불렸다가 이괄의 난(1624) 때에 이 절에 피신한 인조가 은적사라 하였다가 다시 영은사로 고쳤다.
광해군 8년(1616)에는 이곳에 승장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할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고, 여기서 훈련된 승병은 영규대사의 인솔 아래 금산전투에 참여하였다.
영은사 부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불상 6구가 출토되어 조선시대 이전에도 이곳에 사찰이 존재했었음을 짐작케 하는데, 백제시대부터 사찰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규모가 작으나 단아한 모습의 원통전(문화재자료 제51호) 내부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유형문화재 제160호)이 모셔져 있으며, 청동범종(유형문화재 제161호), 아미타후불탱화(문화재자료 제376호), 칠성탱화(문화재자료 제377호)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칠성탱화 : 천재지변을 막을 수 있는 '칠원성군'을 그린 족자
* 신중탱화 : 화엄경을 보호하는 '화엄신장'을 그린 족자
* 독성탱화 : '지혜'를 상징하는 '나반존자'를 그린 족자
관일루는 원통전(영은사의 대웅전) 앞쪽을 지키고 있다. 관일루 오른쪽으로 큰 은행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가을에 오면 단풍든 모습이 멋질 것 같다.
영은사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영은사의 중심 법당이다. 정면에 '원통전(圓通殿)'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법당 안에는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원통전이라는 이름은 "모든 곳에 빠짐없이 널리 두루 통한다"라는 의미로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는 관음보살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음을 뜻한다.
대웅전이 처음 세워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건물은 1933년에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늦은 시간에 도착한 탓에 스님이 원통전의 문을 닫고 있어 내부를 둘러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현판이 걸려 있지 않은 산신각의 모습이다.
영은사 오른쪽 담장을 따라 진남루로 올라간다.
오르는 길에 내려다본 영은사의 모습이 단아하다.
이 다리는 이름이 뭔지 모르겠다. 공산성 내부로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는데 산책로를 이어주고 있다.
공산성 진남루에 도착했다.
진남루는 공산성의 남문이자 정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남(三南, 남쪽의 3도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로를 의미)의 관문이었다.
공산성은 사방에서 문 터가 확인되는데, 그중에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는 성문이 남아 있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남 남아 있었다. 이에 1993년 동문 터에는 영동루를, 서문 터에는 금서루를 다시 세웠다.
진남루는 여러 차례 고쳐 지었지만 그 위치와 모습은 본래이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있는 성문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고 다시 세운 것이다.
쌍수정 사적비는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재위 1623~1649)가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여 세운 비이다.
비에는 이괄의 난과 인조가 공산성으로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 동안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 등이 적혀 있다.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섰다.
쌍수정 사적비는 1624년 인조가 공주를 떠난 직후 세우려고 했으나, 84년이 지난 1708년(숙종 34년)에 지금의 비석이 세워졌다.
*이괄의 난 :이괄(1587~1624)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이 된 인조반정의 보상 과정에 물만을 품고 일으킨 난
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과 목조 지붕 모습의 머릿돌을 갖춘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조금 더 올라 쌍수정에 도착했다.
공산성 쌍수정은 충청도 관찰사 이수항이 1734년(영조10년)에 인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는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서 6일간 머물렀는데 당시 인조는 두 그루의 나무 아래에서 난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인조는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자신이 기대었던 두 그루의 나무, 즉 쌍수(雙樹)에 정3품의 벼슬을 내렸다. 그 후 공산성을 '쌍수산성'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있던 자리에 삼가정을 세웠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 오늘날의 쌍수정은 1970년에 해체한 후 다시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에 쌍수정과 다소 차이가 있다.
조금 늦은 오후에 산책삼아 나온 걸음이 살짝 등산에 가까워진 탓에 이번 공산성 여정은 여기에서 그만 발길을 돌려야 할 것 같다.
공산성 왕궁유적지를 다시 가로질러 금서루로 향한다.
앞쪽은 금강이고 뒤쪽은 낮지만 가파른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천혜의 요새와 같은 입지를 갖추고 있다. 왜 이곳에 성을 쌓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성벽을 따라 걸어보니 그 높이가 높고 대부분 난간도 없어 좀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다. 공산성은 산책하러 오기는 조금 힘들고 운동삼아 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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