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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by 공간여행자 2025. 4. 15.

이탈리아 태생의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 양자이론과 중력이론을 결합한 '루프양자중력'이라는 개념으로 블랙홀을 새롭게 규명한 우주론의 대가 '카를로 로벨리'의 저서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읽었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이 책을 감수하신 이중원 교수님의 글로 책의 끝부분에 첨부되어 있다. 감수의 글 '과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광활한 물리학 여정'이다. 감수의 글만 읽어도 마치 책의 내용을 모두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감수의 글로 대신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나 나름대로의 줄거리를 요약해 본다.

 

I. "기묘하고 아름다운 내부를 들여다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관찰

 

하이젠베르크는 23세의 나이에 알레르기 치료를 위해 나무가 거의 없어 꽃가루도 없는 헬골란트 섬을 찾았다. 

 

닐스 보어는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특정 궤도로만 원자핵으로부터 특정한 거리에서 특정한 에너지로만 돈다는 원자모델을 수립했다. 원소를 가열했을 때 방출되는 빛의 진동수, 즉 원소가 띠는 색을 예측하였다. 그러나 공식은 불완전했고 방출되는 빛의 세기를 알려주지 않았다. 전자는 마술처럼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점프'한다고 가정하였다. 이른바 양자도약이다. 보어의 이상한 궤도와 특이한 도약으로는 전자를 유도할 수 없었다. 

 

하이젠베르크는 헬골란트 섬에서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떠 올렸다. 전자를 핵으로 끌어당기는 전기력을 사용하고 전자가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물질이라는 생각을 포기했으며, 전자의 움직임을 기술하는 것을 포기했다. 관찰할 수 있는 것, 전자가 방출하는 빛의 강도와 진동수만 기술하는 것으로 오직 관찰 가능한 양에 근거해서만 설명하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물리적 변수를 표로 대체하였다. 전자의 출발궤도가 행에 있고 도착궤도가 열에 있는 표이다. 각 행과 열의 교차점에 있는 항목은 특정 궤도에서 다를 궤도로의 도약을 기술한다. 변수를 행렬로 대체한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이 아이디어를 정리하여 괴팅겐의 삼총사(하이젠베르크, 막스 보른, 쿠알 요르단)는 논문으로 제출했다. 폴 디랙은 추상적인 언어로 동일한 이론을 제시하였다. 괴팅겐의 삼총사는 복잡한 계산은 파울리에게 요청하였고 행렬이론으로 계산된 에너지 값은 보어의 이론과 정확히 일치하였고, 방출되는 빛의 세기도 계산이 가능했다.(보어는 본인의 동의 하에 영국특공대에 의해 납치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하였다.)

 

하이젠베르크, 보른, 요르단, 디랙의 계산방식, '오직 관찰 가능한 것에만 국한'하고 물리적 변수를 행렬로 대체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는 아직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으며, 단 한 번의 오류도 없고 지금도 한계를 알지 못하는 유일한 근본 이론이다.

 

에르빈 슈뢰딩거의 확률

 

에르빈 슈뢰딩거는 스위스 알프스의 한 오두막에서  드 브로이의 전자를 움직이는 파동으로 상상하는 제안이 들어있는 입자의 파동설 논문을 읽고 원자의 보어 에너지를 계산하여 파울리와 동일한 결과를 얻었다.(방식은 완전히 다름)

 

전자-파동이 원자안에 있을 때 충족해야 하는 방정식을 알아낸 것이다. 이 방정식의 해를 연구하여 보어의 에너지를 정확하게 추출하였다. 하이젠베르크, 보른, 요르단의 이론과 수학적 관점에서 동일한 값을 예측한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전자는 파동이다.

 

슈뢰딩거의 파동 이름은 Ψ(프시)로 파동함수, 파동역학이라 한다.(괴팅겐의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역학'이라 함)

 

파동역학도 행렬역학 만큼이나 모호하다. 막스 보른은 양자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역학의 필요성을 인식하였고, 슈뢰딩거의 파동함수 값은 공간의 한 지점에서 전자가 발견될 확률을 결정하는 것을 이해했다.

 

슈뢰딩거의 프시( Ψ)는 실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확률을 알려주는 계산도구이다.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의 양자론은 모두 확률을 예측한다.

 

세계의 입자성

 

1925년과 1926년의 양자역학은 관찰 가능한 것만 설명(하이젠베르크의 아이디어)하고 이론이 확률만을 예측한다는 사실(보른)이다.

 

세 번째 핵심 아이디어는 에너지와 다른 물리량들이 기묘하게도 입자성을 갖는다는 것이다.(에너지가 입자일 수 있다는 생각은 양자역학 이전에는 없었음)

 

1900년 독일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의 공식은 열에너지가 서로 다른 진동수의 파동에 분포하는 방식으로 각 파동의 에너지가 기본 에너지의 정수배일 수만 있다는 가설을 추가하여 플랑크 상수 'ħ' (h/2π)로 에너지의 꾸러미와 파동의 진동수 사이의 비례상수를 계산하였다.

 

5년 후 아인슈타인이 빛과 모든 전자기파는 실제로 기본입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입자는 진동수에 따라 고정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최초의 양자로 '광자'라 부르고 광자의 크기는 플랑크상수 ħ로 측정한다. 광자는 그것이 속해있는 빛의 진동수의 ħ배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갖는다.(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 설명)

 

원자의 회전속도는 연속적이지 않고 불연속적인 값만을 갖는다. 입자성은 관찰, 확률과 함께 양자론의 세 번째 핵심 개념이다.

 

 

II. 극단적인 아이디어를 모은 기묘한 동물 화집

 

중첩

 

양자세계의 기묘함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 '양자 중첩'이다.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속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전자는 더 이상 하나의 경로를 따라가지 않는다(하이젠베르크). 한 번에 여러 위치에 있는 것이다(디렉, '중첩원리' - 양자론의 개념적 기초로 삼음), 중첩은 직접 볼 수 없고 중첩의 결과만 볼 수 있다. 중첩의 결과를 '양자 간섭'이라 한다.

 

광자의 경로 분리를 통한 검출실험에서 우리가 관찰하는 순간 파동함수는 '붕괴'하고 Ψ(프시)파동은 한쪽 경로로 도약하여 수렴한다. 양자중첩이란 하나의 광자가 두 경로에 모두 존재하는 것으로 관측하면 도약하여 한쪽 경로에만 존재하고 간섭이 사라진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은 잠들어 있으면서 동시에 깨어있는 양자중첩 상태의 고양이이다.

 

다세계, 숨은 변수, 물리적 붕괴

 

양자론에 대해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수년 동안 논쟁을 벌였다. 아인슈타인은 현상에 대한 실재적인 그림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고, 보어는 양자론의 개념적인 새로움을 옹호하였다.

 

 

 < 다세계 - 다세계 해석 >

 

슈뢰딩거의 해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해석이다. 파동  Ψ(프시)를 확률로 해석하지 않고 실제 세계의 모습을 기술한다고 본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실재하는 Ψ(프시)파동으로 기술, 실제로 '깨어있는 고양이'와 '잠든 고양이'의 중첩상태에 있는 것이다.

 

내가 고양이를 볼 때 나의 Ψ(프시)파동은 고양이의 Ψ(프시)파동과 상호작용하고 나의 Ψ(프시)파동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 둘 다 실재한다는 것이다.(깨어있는 고양이를 보는 나와, 잠든 고양이를 보는 나가 둘 다 존재)

 

전체 Ψ(프시)는  두 부분, 즉 두 '세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평행세계가 존재한다는 다세계 이론이다.

 

 

< 숨은변수 - 복사본이 무수히 많은 것을 피하는 한 가지 방법 >

 

물질파의 개념을 창안한 드 브로이가 고안하고 데이비드 붐이 발전시킨 이론이다. 전자의 Ψ(프시)파동과 실제 전자가 모두 존재, 즉 항상 확고한 위치는 갖는 실제 물질 입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전역학과 같이 위치는 하나뿐이고 '양자중첩'은 없다. 실제 Ψ(프시)파동과 빈 Ψ(프시)파동이 간섭을 일으킬 수는 있다. 오직 한 상태만 있지만 간섭을 일으키는 파동의 일부가 존재한다. 전자의 행동은 변수(파동)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 변수는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 숨은 변수는 상대성을 마구 위반하는 문제점이 있다.

 

 

< 물리적 붕괴 - 양자역학의 예측은 무언가를 간과한 근사치라는 생각 >

 

관찰과는 무관한 물리적 과정이 실제로 존재, 때때로 자발적으로 발생하여 파동이 분산되는 것을 막는다.(파동함수의 물리적 붕괴) 관찰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어나며 거시적일수록 더 빠르게 일어난다.

 

현재까지는 다른 세 가지 해석보다 양자론이 항상 옳은 것으로 나타나다.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다.

 

양자역학의 해석들은 Ψ(프시)를 실재하는 대상으로 간주, 불확정성을 피하려고 한다. Ψ(프시)는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계산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식론적 해석은 Ψ(프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요약에 불과하다고 본다. 큐비즘은 양자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세계를 '완성'하려고 하지 않는 사고방식이다. Ψ(프시)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 가지는 '정보'일뿐이다. 물리학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아는 정보를 기술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거나 측정할 수 없는 세계의 실제모습을 그리는 것을 포기하고 보이는 것에 대해서만 얘기한다.

 

관찰할 수 없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양자론의 해석들은 '관찰이란 무엇이며, 관찰자란 무엇인가'라는 '관계'라는 개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III. 너에게는 실재하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세상이 단순해 보였던 때가 있다.

 

물리학은 세계는 입자들이 여러 힘에 의해 밀고 당기며 날아다니고 있는 광활한 '공간'이라는 이미지를 제공했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은 여기에 전가지 '장'을 추가했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조차 시공간의 기하적인 구조인 '장'에 의해 전달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림을 완성했다. 그때는 세상이 단순해 보였다.

 

그러나 고전물리학의 개념적 명료함은 양자에 의하여 사라졌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

 

양자론이 설명하려는 것은 자연의 한 부분이 자연의 다른 부분에게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는가 하는 것이다.

 

양자론의 '관계론적' 해석의 핵심은 양자론은 양자적 대상이 우리(관찰자)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는 발상이다. 어떤 물리적 대상이 다른 임의의 물리적 대상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기술하는 것이다.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이 세계는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이 세계는 상호작용하는 실체들의 광대한 네트워크이다.

 

양자역학의 '관찰'은 두 물리적 대상 사이의 모든 상호작용이라 볼 수 있다. 양자론은 사물들이 서로에게 나타나는 방식을 기술하는 것이다. 양자론은 사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에 대한 이론이며, 그것은 자연에 대한 최선의 설명이다.

 

양자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두 가지 개념적 공간

 

< 상호작용 없이는 속성도 없다. >

 

대상의 속성은 그 속성이 발현될 때의 상호작용 및 그 속성이 발현되는 상대 대상과도 분리할 수 없다. 상호작용이 없으면 속성도 없다. 전자가 어떤 것과도 상호작용하지 않을 때 그 전자에는 물리적 속성(위치, 속도 등)이 없다.

 

< 속성은 상대적일 뿐이다. >

 

대상의 A의 속성이 대상 B에 대해서 실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꼭 대상 C에 대해서도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희박하고 가벼운 양자의 시계

 

대상의 속성은 상호작용하는 순간에만 존재하며, 그 속성이 한 대상과의 관계에서는 실재하지만 다른 대상과의 관계에서는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양자론은 모든 대상의 모든 속성이 관계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물리적 변수는 사물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서로에 대해 나타나는 방식을 기술한다. 물리적 물체가 상호작용할 때는 관계가 성립하고 그리하여 드러나는 세계는 희박한 세계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이 세계가 견고하고 연속적이라는 생각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지만, 실제 세계는 작은 규모에서는 연속적이지도 견고하지도 않으며 불연속적인 사건들과 상호작용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을 뿐이다.

 

파동 Ψ(프시)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사건이 우리와의 관계 어디에서 일어날 것인가를 확률로 계산한 것으로, Ψ(프시)에 의해 기술되는 '양자상태'는 항상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IV. 현실을 엮는 관계의 그물망

 

시계에 대한 기존의 이해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기묘한 현상들이 있다.

 

얽힘

 

사물들의 상호의존성을 잘 나타내는 현상이 바로 기묘한 양자 '얽힘' 현상이다. 세계에 대한 기존의 이해에서 우리를 가장 멀어지게 하는 현상이다.

 

양자역학에서 얽힘은 과거에 만난 적이 있는 입자 같은 두 물체가 이상한 유대를 유지하는 현상이다. 양자적으로 중립된 상태에 있는 한 쌍의 읽힌 광자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쪽이 빨간색으로 판명되면 다른 쪽도 빨간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멀리 떨어져 얽혀있는 두 입자가 사전에 합의하지도 않았고,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은 적도 없는데 어떻게 동일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관계론적 관점에서 보면 두 결과가 동일한지 여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멀리 떨어진 두 광자의 색을 동시에 모두 볼 수 있는 물리적 대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대상 사이의 상관관계도 두 대상의 속성이다. 이는 모든 속성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제3의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얽힘은 둘이 추는 춤이 아니라, 섹이 추는 춤인 것이다.

 

셋이 추는 춤

 

측정은 한 대상과 다른 대상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이 끝나면 한 대상은 '다른 대상에 대한 정보를 얻게'된다.

 

얽힘은 특별한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드문 현상이 아니다. 외부의(제3의) 물리계의 관점에서 상호작용을 볼 때 흔희 발생하는 현상이다. 얽힘은 현실을 엮는 관계자체를 외부에서 본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양자론의 문법에는 정합성이 갖추어져 있으며, 이것은 상호주관성의 기반이 되어 우리의 공통된 세계사의 객관성을 뒷받침한다.

 

유일하면서 무궁무진한 정보

 

우리는 양자 물리학을 물리계들이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이론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전물리학과 양자물리학의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공준'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한 물리적 대상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관련 정보의 (최대)양은 유한하다.

              ΔX ΔP ≥ ħ/2

 

2. 정보는 무궁무진하다 : 비가환성(순서를 함부로 바꿀 수 없다.)

   - 먼저 X(위치)를 하고 나서 P(속도)를 측정하는 것과, 먼저 P(속도)를 하고 나서 X(위치)를 측정하는 것은 결과가 다르다.

   - 순서가 중요한데 이것이 행렬의 특징이다.

            XP - PX = i ħ   (이 방정식이 순서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우리는 세계를 큰 규모에서 보기 때문에 이 세계의 입자성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것은 수많은 작은 변수들의 평균치이다. 개별 분자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 전체는 보는 것이다. 너무 많은 변수가 관여하기 때문에 요동은 무의미 해지고 확률은 확실성에 가까워진다. 흔들리고 요동치는 양자 세계의 무수히 많은 불연속적인 변수들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서는 몇 개의 연속적이고 잘 정의된 변수로 귀착된다.

 

 

V. "현상이 모습을 드러낼 상대가 없으면 현상에 대한 명료한 기술은 없다."

 

보그다노프와 레닌

 

20세기 물리학의 가장 위대한 혁명인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은 에른스트 마흐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

 

마흐는 "과학"은 모든 '형이상학적' 가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식은 오직 '관찰 가능한 것'에만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흐의 철학은 공간 속을 움직이는 물질의 역학을 요소와 함수의 일반 집합으로 대체한 진정한 자연철학이었다.

 

마흐에게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 사이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고 감각은 물리적인 동시에 정신적이다. 그것이 실재인 것이다.

 

마흐의 생각과 마르크스·엥겔스의 사상 상의 일치점은 보그다노프에 의해 더욱 발전되어 혁명 직전의 러시아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마흐를 맹렬히 공격하고 보그다노프를 비난한다. 곧이어 보그다노프는 당 중앙위원회에서 축출된다.

 

레닌은 보그다노프를 관념론자라고 비난하고 관념론을 혁명의 적인 부르주아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으로 여기며, 인간과 그의 의식과 정신을 구체적이고 객관적이며 인식 가능한 세계의 한 측면으로 보는 유물론을 관념론에 대치시킨다.

 

레닌은 유물론을 "정신의 외부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세상에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물질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물질을 알면 우리는 '확실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보그다노프는 분명 이 세계는 우리의 정신 밖에 있지만, 소박한 유물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섬세하며, 세계가 인간의 정신 속에만 있다고 보는 관점과 세계가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물질 입자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관점 사이의 양자택일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마흐는 과학이란 현상을 조직화할 수 있게 해주는 한에서만 어떤 것을 실재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고, 이러한 과학관이 열어준 공간 속으로 하이젠베르크가 들어와 전자에서 궤도를 벗겨내고 전자를 그 현상의 측면에서만 다시 해석했던 것이다. 바로 이 공간 속에서 양자역학의 관계론적 해석의 가능성도 열린다. 즉 세계를 기술하는데 사용되는 요소는 각 물리계의 절대적 속성이 아니라 물리계들이 서로에게 나타나는 방식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 것이다.

 

실체없는 자연주의 : 맥락성

 

마흐가 제시한 시각 덕분에 하이젠베르크가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던 셈이다.

 

실재의 모습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경험의 결과이다. 그러나 경험은 제한되어 있고 과거의 일반화를 절대적 진리로 삼아서는 안된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협소한 형이상학적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세상에 대해 새롭게 알게된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과학을 세계에 대한 지식의 원천으로 존중하는 태도는 철학자들의 급진적 자연주의로 발전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발전에 기여했지만 이론의 일관성이 없고 믿을 수 없으며 불완전하다고 비난했다. 보어는 아인슈타인의 비판에 맞서 양자론을 방어했다. 양자역학은 상호작용이 현상의 불가분한 부분이며, 어떤 현상을 명확히 기술하려면 그 현상이 발현되는 상호작용에 광여하는 모든 대상을 포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상의 속성은 상호작용하는 상대 대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맥락성'은 양자물리학의 이러한 측면을 나타내는 기술적 명칭이다. 우리는 이 세계가 속성을 지닌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뛰어넘어 모든 것을 관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가르주나

 

양자역학의 핵심적 발견을 이해하는 방식은 1990년대 중반 '양자역학의 관계론적 해석'이 등장하면서 더욱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절대적이라 생각했던 양이 사실은 상대적이었다는 발견은 물리학의 역사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관계와 상호작용이라는 생각이 철학사를 통해 거듭되어 왔다. 세계는 독립적인 실체들로 나뉘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편의에 따라 나누어 놓은 것이다.

 

물리학은 이 관계들의 세계를 떠받치는 근본적인 실재를 제공해야 한다. 우리는 그 어떤 기본적인 실체도 그것이 상호작용하는 대상의 맥락 없이는 기술할 수 없는 것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양자를 이해하기 위해 철학자의 텍스트를 헤매고 다녔지만 이 놀라은 이론이 제공하는 개념적 기반을 찾지는 못했다. 

 

나가르주나는 인도 철학의 초석 중에 하나이며, 2~3세기 사람이다. 나가르주나의 핵심 논지는 다른 어떤 것과도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양자역학과 공명을 일으킨다. 나가르주나는 공(空)을 말한다. 궁극적인 실재, 본질의 부재, 공이라는 것, 없다는 것이다.

 

나가르주나의 공(空)응 깊은 위안을 주는 윤리적 태도를 길러주기도 한다. 우리가 자립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집착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VI. "자연에게는 해결된 문제다"

 

단순한 물질

 

양자역학은 초자연적 현상이나 대체의학, 신비한 파동이나 진동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마음의 작용 같은 복잡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을 사용하려는 시도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누구나 한 번은 이 세상이 단순한 물질, 공간 속에서 움직이고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면, 나의 생각과 지각, 주관성, 가치, 아름다움, 의미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질문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양자역학은 이러한 질문들에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는다. 양자론은 마음을 이해하는데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다. 양자론은 질문의 조건을 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미세한 입자들을 관계의 관점에서 잘 기술하고 관계가 없이는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지작과 의식의 기초 형성 요소를 더 잘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의미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인간은 의미의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면 의미의 세계는 물리적 세계로부터 나올 수 있어야 한다. 물리적 측면에서 의미의 세계란 무엇일까? 정보와 진화라는 두 가지 개념을 통해 답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새넌의 정보이론에서 정보는 단지 어떤 것의 가능한 상태의 수를 세는 것이다. 또한 '상대적 정보'는 두 변수 간의 물리적 상관관계를 측정하는 개념이다.

 

양자구조를 고려하면 '상대적 정보'는 물리적 세계를 설명하는데 핵심적 개념이다. 상대적 정보는 세계를 구성하는 상호작용들의 직접적인 귀결인 것이다. 의미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두 사물을 연결한다. 그러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다. 대부분의 상관관계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진화의 발견으로 유용성과 관련성과 같은 개념의 생물학적, 물리적 개념이 명확해졌다. 생물학적 진화의 발견으로 생물에 대한 개념과 자연계의 다른 사물에 사용하는 개념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구조의 유용성과 존재의 인과관계를 뒤집어 생각하면 구조가 왜 존재하는가 이해하게 된다. 기능이 구조의 목적이 아니다. 생물은 기능적이기 때문에 번식하고 지구를 채운다.

 

다윈은 생물학적 구조의 변이성과 자연선택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변이성이 있기에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을 계속 탐색할 수 있고, 자연선택이 있기에 이 공간의 더욱 확장된 영역으로, 즉 구조와 과정이 지속될 수 있는 곳으로 점점 더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분자생물학은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유용성과 관련성은 실제로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자연계의 특징인 것이다. 변이와 자연선택은 멋진 개념이지만 자연계에서 '의미'라는 개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설명하지는 못한다. 의미에는 지향적인 내포가 있다.

 

여기에 정보와 진화라는 두 가지 아이디어를 결합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유관한 상관관계의 존재로부터 의미 개념의 물리적 원천을 찾을 수 있다. 바로 관련된 상대적 정보다.

 

정보라는 개념은 심적 세계의 의미와 물리학 사이의 사슬의 첫 번째 고리이자 어려운 고리이다. 무리적 세계와 마음의 세계를 잇는 첫번째 단계이다. 여기에 표현과 맥락들을 추가하면 다양하고 더 완전한 의미 개념에 가까운 무언가를 얻게 된다.

 

두 대상이 상대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제3의 대상과 관련된 것이다. 상대적 정보의 기초적 개념은 물리적 구조이고, 그 위에 더 복잡한 정보 개념들이 놓이고, 그것들이 이제 의미론적 값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정보이며, 이는 우리와 세계 사이의 상관관계이다. 우리는 이 상관관계 안으로부터 세계를 알게 된다.

 

안쪽에서 바라본 세계

 

의미있는 정보라는 개념은 정신적 세계의 어떤 측면을 물리적 세계와 연결하지만 이 두 세계 사이의 거리감은 해소하지 못한다. 

 

양자역학에 따라 세계를 다시 생각하여 세계가 관계적이라면, 우리가 물리적 실재를 물리계에 자신을 나타내는 현상으로 이해한다면, 세계를 외부에서 바라본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능한 세계에 대한 기술은 궁극적으로 모두 내부로부터 나온 것이다.

 

양자역학은 이러한 현상이 이미 무생물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이란 오직 상대적인 사실일 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이 없는 세계에 있게 된다.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이 처한 어려움이 바로 이 점이다.

 

우주는 상호작용하며, 삶은 상대적인 정보를 조직화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한, 우리는 실재를 구성하는 관계의 그물망의 복잡한 자수무늬이다.

 

심신 문제는 우리에게 신비로운 문제이지만, 자연에서는 해결된 문제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이해하는 것뿐이다.

 

 

VII. 하지만 정말 가능할까?

 

이 세계를 조금 더 보여줄 수 있을 지도

 

 

우리는 어떻게 불 수 있는 걸까? 대부분의 신호는 눈에서 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뇌에서 눈으로 이동한다.

 

뇌는 이전에 일어난 일과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무언가가 보일 거라고 예상하고 예견되는 상을 만들어 눈으로 전달한다. 예상과 보이는 것의 불일치가 감지되면 그때만 뇌로 신호를 보낸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자신의 눈에 비친 것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이것은 뇌의 일반적인 작동방식으로, 의식은 신체와 세계가 가변적이어서 계속적으로 변동하는 입력을 예측하려는 뇌의 활동이다.

 

우리는 시계에 대한 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것을 수정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져 온 것이다.

 

우리는 새로 알게 된 사실을 통해 우리의 세계상을 업데이트한다. 현실에 대해 생각하는 새로운 지도를, 세계를 조금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지도를 찾아낸다. 이것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우리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살재는 상호작용의 그물망을 짜는 사건들로 가장 잘 묘사될 수 있다. '개체'는 이 그물망의 일시적인 매듭에 불과하다. 개체의 속성은 이러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순간에만 결정되며,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견고한 무언가에 의문이 제기될 때마다, 다른 무언가가 열리고 우리는 더 멀리 볼 수 있게 된다.

 

 

 

양자론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카를로 로벨리의 이 책은 양자론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이해의 방식에 대한 제안까지 포함하고 있어 물리학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내용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