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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2024. 12. 19)

by 공간여행자 2024. 12. 25.

한 겨울의 추위 속에서 만해 한용운 선사의 얼이 서려 있는 곳 심우장(尋牛莊)을 찾아왔다.
 
민족 자존의 공간, 심우장
 
" 한용운이 심우장에 기거하던 1930년대 중반 이후는 일본 제국주의의 극성기로 독립운동에 대한 강한 탄압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최린, 최남선 등이 친일로 변절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한용운은 끝가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그가 기거하던 심우장도 민족 자존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한용운은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광복을 1년여 앞둔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하였다."(심우장 안내 리플렛 중에서)
 
심우장은 서울시 성북동에 위치하고 있다. 성북동은 문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좁은 골목길을 10여분간 걸어 올라 심우장의 대문을 마주한다.

 
 
심우장은 1933년 벽산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방응모, 박광 등 지인들의 도움으로 성북동의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방 두 칸짜리 집을 지어 심우장으로 이름지었다고 한다.

 
 
부엌의 모습이 단아하다.

 
 
관리소 앞에 만해 한용운의 연대기와 심우장이라는 시가 걸려있다.

 
 
심우장은 사적 제5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심우장 안으로 들어서니 주요사건 별 연도와 만해 한용운의 연보가 자세히 기록되어 걸려있다.

 
 
만해의 대표적 시집인 '님의침묵'도 전시되어 있다.
 
님의침묵   - 한용운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둘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있는 온돌방에는 만해가 사용하던 책상과 책장이 있고, 한쪽 벽에는 초상화도 걸려있다.

 
 
심우장을 둘러 보고 뒤산에 있는 데크길을 오른다. 오르는 길에 내려다본 심우장의 모습이다. 대문 안에 우뚝선 소나무 한그루가 심우장을 지키고 서있다.
 
조선총독부가 있는 쪽을 바라보지 않게 하려고 심우장은 북향으로 지었다고 한다. 

 
 
전망대로 오르니 성북동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기온은 낮으나 하늘은 맑고 햇빛은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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